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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회관 의원열람실에거 책을 고르다가 이 책을 발견했다. <내 마음이 편해질 때까지>
범상치 않은 제목과 표지. 책을 빌린 그 날 퇴근길 그리고 그 다음날 출근길.
이 책을 읽으며 오만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누가 봐도 어려운 형편의 할머니 할아버지...
자신의 형편이 넉넉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나눔을 실천한 천사같은 분들.
저자인 박영희씨가 그들을 찾아가서 인터뷰를 한 후 쓴 책 <내 마음이 편해질 때까지>
이 책을 읽는 내내 나 스스로를 되돌아 볼 수 밖에 없었다.
없는 형편에 모으고 모아... 기부를 한 천사들.
기부를 목적으로 통장을 만들고, 통장이 만기가 되자 그 돈을 고스란히 기부한 천사들...
그들은 한결 같이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과거를 극복하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 열심히 말이다.
공공기관에서 30년 넘게 근무한 아버지 덕에 어려움을 모르고 자란 지난날.
부모님 품안에서 등록금 걱정 없이 대학까지 마치고, 대학원 공부까지 한 나.
사회복지를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아낌없이 베푸는 것이 낯설은 나.
이 책을 보며 한없이 반성했다. "나는 겉으로만 베풀며 살고 있는 것 아닌가?" 하고 말이다.
소득공제시즌. 사무실로 후원금 영수증이 날라오고 있다.
월드비젼, 굿네이버스, 유엔 난민기구,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장애와 인권 발바닥 행동, 에이블복지재단, 여성단체연합....
월급의 5%를 기부하면서 스스로 흡족해 하던 지난 날.
이 책에 나오는 주인공들 보다 더 많은 돈을 벌면서도... 더 풍족한 환경에 살면서도... 그들과 같이 기부하지 못하고 있는 나. 책을 읽으며... 기부를 위한 통장을 만들어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나를 위한 적금통장이 아닌 기부를 위한 통장. 그래서 목돈이 생기면, 40세가 넘은 지적장애인이나 자폐성장애인을 위한 시설에 기부하고 싶다. 막내 외삼촌과 같은 사람들을 위한 시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시설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그들을 위한 시설이 있다면 그 곳에 기부 하고 싶다. 당장 다음주에 통장을 하나 만들어야지! ^^
<내 마음이 편해질 때까지>의 주인공들을 모두 소개하고 싶다. 글이 좀 많이 길어진다고 해도...
고물을 모아 마음병 고친 김영권 할아버지와 배추선 할머니
공무원으로 34년 근무하다가 퇴임을 한 후 고물을 모아서 내다 팔고 그 돈을 모아서 방송국에 1000만원 기탁한 대단한 부부.
골목을 막 빠져나왔을 때다. 도로변에 빈 깡통이 보였다. 허리를 반쯤 굽혀 음료 깡통을 줍는 김 씨의 손이 분주해졌다. 도로변에 핸드카를 잠시 세워 둔 그는 생활쓰레기를 모아 둔 곳으로 다가가 살핀 다음, 크고 작은 골목들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그의 그런 모습을 우두커니 서서 지켜보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마시고 먹다 버린 것들을 허리 굽혀 줍다 보면 이웃을 향한 관심 또한 깊어질 수밖에 없을 거라는. 버리는 일에 익숙해진 손과 그걸 주워 담는 손은 얼마나 다른가. 전자의 손이 세상을 더럽히는 손이라면 후자의 손은 더없이 거룩해 보였다. - 29 page
불편한 거동이지만 저금통 두 개로 이웃과 소통하는 노윤회 씨
버거씨병(폐쇄성 혈전혈관염)으로 아내가 도망가고, 딸 2명과 사는 노윤회 씨. 그를 위해 동네 주민들이 상가 공간에 담배 가게를 내주고, 담배 상권을 줘서 담배를 팔게 되었고, 이웃의 도움으로 자립하게 된 그는 담배를 판매한 수익의 절반을 저금통에 모아서 그 저금통을 빈곤 아동을 위해 굿네이버스에 기부를 했다.
노씨는 자신의 선행이 언론에 밝혀지면서 입장이 난처해지고 말았다. 한쪽에서는 성찬이 일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제 앞도 못가리는 주제에 무슨 불우 이웃 돕기냐며 지탄의 목소리가 높았다. 이런 반대되는 소리를 귀로 직접 듣지 않았다면 또 모를까 노 씨로서는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압박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신경이 예민한 그로서는 수면제를 복용하지 않고서는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 - 51 page
이 부분을 읽으며 많은 생각을 했다. 기부를 받아야 할 사라이 하는 기부라...
내 주변에 노윤회씨 같은 사람이 있었다면, 나 또한 동일한 반응이었겠지? "제 앞가림도 못가리는 주제에 무슨 불우 이웃 돕기냐?" 어려운 형편에 더 어려운 사람을 돕기. 이런 사람들도 있는데... 더 많은 돈을 가진 우리는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걸까?
"뭐 있나요,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밖에. 만약 저에게 이웃이 없었다면 숨이나 제대로 쉴 수 있었을까요? 조금 늦긴 했지만 네 이웃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과 같다는 그 뜻을 이제야 좀 알 것 같습니다." - 56 page
자식들을 못 가르친 것이 한이 되어 모은 돈을 장학금을 주는데 써달라며 기부한 이공심 할머니
이 책을 읽다보니... 대다수의 기부금이 장학금으로 쓰여졌다.
배우지 못한 한, 자식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한... 그 한을 풀기 위해 장학금을 기부한 이들.
지난해 봄이었다 할머니는 푼푼이 모은 돈을 챙겨 이웃하며 지내는 스님을 찾아갔다. 도라지 농사를 지어 꼬박 3년을 모은 이 돈을 어디에 써야 할지 그걸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할머니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잠시 들른 스님의 말에 따르면 살아생전 그런 돈은 처음 봤다고 했다.
"꼬깃꼬깃 접은 돈을 비닐봉지에서 꺼내는디 내 콧등이 먼저 시큰거립니다. 부처님을 모시는 손으로 그 돈을 받았으니 내 기분은 어쩄겄소. 3년을 모았다는 그 돈을 내밀면서 이리 부탁합니다. 요새도 월사금 못 내서 공부를 중단하는 학생들이 있을지 모르니 그 돈을 거기에 써 달라고." - 69 page
어려운 형편임에도 평생 모은 돈을 보은군민장학회에 기부한 정신대 피해자 이옥선 할머니
현대사의 산 증인. 정신대 할머니... 그 중 한명이었던 이옥선 할머니의 인생과 장학금.
이 책에선 각 기부자의 인생을 스케치 하며 그 혹은 그녀가 왜 기부를 하게되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었다. 그 중 유독 눈길을 끌었던 이 할머니.
진폐증을 앓았던 남편이 세상을 뜨자 성장한 자녀들이 뒤따라 곁을 떠났다. 뭐라도 해야 텅 빈 자리를 메울 것 같아 인삼에 손을 댄 할머니는 돈이 들어오는 족족 예금통장에 넣어 뒀다가 그 돈으로 얼마간의 땅을 장만했다. 머잖아 돌아갈 곳은 이제 한 줌 흙. 마치 그날을 손꼽아 기다렸다는 듯이 할머니는 땅 판 돈 2,000만원을 보은군민장학회에 기탁했다.
"한 날 곰곰히 내가 왜 위안부가 되었을까 하고 생각해 보니 그게 다 못 배운 죈 거라. 그리고 또 하나는 미륵님을 볼 염치가 있어야 말이지." - 88 page
평교사로 37년간 근무하면서 월급의 10분의 1을 제자들을 위해 기부한 유영빈 선생님
월급의 10분의 1을 평생 기부할 수 있을까? 정말 대단한 그리고 열정이 가득했던 유영빈 선생님.
모든 선생님들이 그와 같았다면... 지금과 같이 학교폭력이 심각한 문제가 되었을까?
"탄탄대로를 네 차례나 고사한 건 순전히 아이들 떄문이었습니다. 적어도 나 자신과 한 약속을 우선 지키는 일이 내가 품은 사상의 바탕이었으니까요. 물론 내 월급의 십일조로 여남은 아이들의 점심과 학용품을 해결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부족했습니다. 이 아이가 마음에 걸리면 또 저 아이가 걸리고...... 그나마 기특한 건 호봉이었습니다. 월급봉투가 두꺼워지니 아이들에게 옷도 사 줄 수 있고 얼마간의 장학금도 마련할 수 있었지요." - 101 page
37년간 오직 평교사만을 고집해 온 유영빈 씨. 교단을 떠난 지 꽤 되었건만 그는 지금도 변함없이 매달 연금으로 나오는 돈 중에서 10분의 1을 모 시설에 기부하고 있었다. - 112 page
시장 바닥 20년 만에 장학금 1억을 모은 정외순 할머니
가장 많은 금액을 기부했던 분. 1억원...
나는 언젠가 이 돈을 기부할 수 있을까? 아니... 기부를 위해서 1억원을 모은다고 해도, 이 돈을 온전히 기부금으로 낼 수 있을까? 흔들리지 않을까? 정말 대단한 분...
자그마치 20년 만에 1억원이 다 채워지자 할머니는 대구에 사는 큰아들에게 제일 먼저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런데 아들의 반응이 영 시큰둥해 보였다. 한술 더 떠 아들은 1억이 무슨 개 이름인 줄 아느냐며 콧방귀를 뀌었다. 순간 할머니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자 봐라, 이것이 네 엄마가 시장 바닥을 뒹굴며 쌓은 신뢰의 밑거름이다, 라고 한바탕 쏘아 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1억은 꿈만 같았던 것이다.
농담 반에 진담을 섞어 큰아들에게 통보한 할머니는 다음날 오전 군청을 찾아갔다. 어제 전화 통화를 한 아들처럼 군수의 표정이라고 해서 특별히 다를 건 없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줄 장학금을 내러 왔다니까네 군수님이 내를 힐끗 쳐다보며 이리 묻지 않겄나. 그래 할매요, 장학금으로 얼마를 낼 거냐고."
사람을 면전에 두고 업신여기는 것 같아 속이 좀 상했지만 할머니는 일절 내색하지 않았다. 대신 손가방에 든 통장과 도장을 꺼내 내밀자 군수의 눈이 폭탄처럼 터지고 말았다.
대번에 자세를 고쳐 앉은 군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뒤 군청 건물을 막 빠져나올 때였다. 앓던 어금니를 뺀 것처럼 할머니는 속이 다 후련했다. 성모님과 한 약속을 지켰다는 사시렝 고마웠고, 또 그 약속을 지키고자 여기까지 달려온 시간들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스쳐갔다. 그 중에서도 육성회비를 내지 못해 일주일 내내 화장실 청소를 했다는 큰 아들의 한마디가 가슴을 쿡 찔렀다.
- 중략 -
"시장 바닥에서 장사하다 보면 허피 디비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사람처럼 영악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동물이 또 있을가. 그래도 사람한테 희망이 하나 있다므 서로 갈라 묵을 줄 안다는 기다. 죽었다 깨나도 짐승은 이걸 못한다 아이가." - 132~133 page
장학금 기부로 마음의 빚을 던 왕재철 할아버지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며, 큰사위에게 빌린 400평 땅에 옥수수를 2모작하여 그 수익금을 장학금으로 기부한 할아버지. 정말 세상엔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참 많다.
퇴근 무렵 시청을 찾았을 떄 4년 전 광씨를 맞은 사회복지과 직원은 당시의 전말을 이렇게 들려주었다.
"제가 본 왕재철 씨의 첫 인상은 경제활동을 할 만한 분이 절대 아니었다는 겁니다. 입고 있는 차림새 또한 마음에 걸렸던 게 사실이고요. 뭐랄까요, 마치 집 나온 사람처럼 어딘가를 며칠 헤메다 온 사람 같았다니까요. 그런 양반이 저어게 제법 두툼한 돈 봉투를 내밀었으니 얼마나 당혹스러웠겠습니까. 꺼림칙하기도 했거니와 저걸 함부로 받았다간 내 밥줄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왕재철 씨가 그 돈을 어디에 써 달라고 하던가요?"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성금을 못 냈던 것과 자녀분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써 달라고 했습니다."
"그럼 그 날 돈을 받긴 받았습니까?"
"지금 생각해 봐도 그날 하루가 참 길었던 것 같습니다. 이 돈을 받기 전에는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고 버티는 바람에 시장님께 보고가 되었고, 왕재철 씨를 신원조회하는 소동까지 벌어졌거든요. 다행이 주소지는 별 탈이 없었지만 신원조회 결과 남을 도울 만한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 150~151 page
삼풍백화점 붕괴 시 목숨을 걸고 사람들 살리는 소방관들을 본 후 소방서에 4,500만원을 기부한 김춘성 할이버지와 양부억예 할머니
"2009년을 끝으로 소방직을 떠났으니 숨김없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지체 장애도 그렇지만 그날 두 분의 얼굴을 보는 순간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고난과 역경이 마치 손금처럼 보였다고 할까요. 송구하지만 봉투를 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 돈 다시 가지고 가셔서 맛있는 것도 사 드시고, 겨울 나실 때 기름 아끼지 말고 따뜻하게 지내시라고 했습니다. 요즘 어르신들 노후다 뭐다 해서 얼마나 요란합니까. 만약 그날 김춘성 어르신의 입에서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소방관이란 말만 나오지 않았어도 그 돈 절대 받지 않았을 겁니다." - 176 page
장학재단을 위한 종잣돈이 된 600만원을 기부한 장봉순 할머니
아이를 낳지 못해 아이들이 학교 가는 것만 봐도 눈물이 났다던 장봉순 할머니.
그녀가 돈이 없어 학업을 할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해 600만원을 기부했고... 할머니의 기부를 보고 동합한 동네 주민과 지역유지들. 아름다운 향기는 널리널리 퍼져서 주변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것 같다.
" 할머니가 기부한 600만원이 종잣돈이 되면서 현재 2억 가까이 모아졌는데 제일 먼저 동참한 분들이 누구였는지 아십니까? 같은 마을에 사는 주민들이었습니다."
머잖아 북삼 읍사무소에 장학 재단이 설립될 거라고 했다. 장학 재단을 설립하려면 최소 2억원의 돈이 필요한데 현재로서는 상당히 희망적이라고 했다.
"아무튼 장봉순 할머니는 우리 모두에게 너무 큰 선물을 안겨 주셨던 것 같습니다. 주민들에 이어 지역 유지들이 동참을 선언했고 그로 인해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니 이거야말로 일석이조가 아니고 뭐겠습니까. 나중에 할머니께서 우리 곁을 떠나고 없더라도 십시일반만큼은 두고두고 회자될 것 같습니다." - 195~196 page
자식들을 못 가르친 한을 장학금으로 푼 모복덕 할머니와 채동만 할아버지
"몸이 예전과 다르게 힘든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할 건 해야겠습니다. 그라고 다 죽은 나를 다시 살려 준 건 이참에 그 빚을 갚으라는 하늘의 지시가 아니었을께라?"
무슨 일이든 시종일관 하는 성미답게 모씨는 1,000만원 짜리 적금이 만료되자 그 돈을 우체국장에게 맡겼다. 괜히 집으로 가져갔다간 작심삼일이 될 수도 있었다.
"돈이 안 그럽디여. 주머니 속으로 들어간 날에는 꺼내기가 역나 어렵단 말이요."
한사코 마다하는 우체국장을 설득해 집안 사정이 어려운 학생들을 찾아 대신 전해주라는 말을 남기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다. 돈 많은 부잣집 자식이야 납부금 통지서가 날아와도 별 걱정이 없겠지만 모씨에게 그 통지서는 사약처럼 느껴졌다. 돈을 좀 빌려 볼거라고 부잣집을 찾아갔다가 쫒겨난 경험을 갖고 있는 그로서는 더욱 그랬다 - 214 page
가난을 경험한 후 다른 가난한 이들위해 천만원을 시청에 기부한 김옥환 할머니
우선 할머니는 논 다섯 마지기를 팔아 둘째 아들과 지낼 전셋집부터 구한 뒤 시청을 찾아갔다. 많은 돈은 아니지만 이 돈을 꼭 전해 주고 시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 나이 되도록 살아 보니까 배고팠던 기억이 제일 서럽게 남아 있는거라. 남들 세 끼 먹을 때 한 끼밖에 못 먹은 죄로 키도 크다가 말았지, 그게 또 예순을 넘어서니까 골병으로 나타나지......"
그러니까 1,000만원을 들고 시청을 찾아간 것도 혹시 있을지 모를 그들에게 쌀을 팔아주기 위해서였다. - 234 page
라디오에서 밥을 못 먹는 아이들에 대한 사연을 들은 후 그 아이들을 위해 고물을 주어 판 돈을 기부한 김성공 할아버지
"돈이 좀 모이니 마음이 바빠지더군. 그 사이 아이들이 굶어죽을 수도 있잖은가."
2년간 고물을 주워 모은 200만원을 면사무소에 기탁하고 서너달 지나서였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현기증이 갈수록 심해지자 김씬느 병원을 찾았다. 당뇨를 조기에 치료하지 않아 발가락이 썩어들어가고 있다는 의사의 말에 김씨는 싱겁게 웃고 말았다. - 253 page
이들은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 신기하고 또 신기한 분들...
그리고 정말 많은 자극을 준 분들...
부분 부분 저자의 작위적인 글쓰기가 거슬리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많은 감동을 준 책.
<내 마음이 편해질 때까지> 이 책을 대기업 오너들이 좀 보면 좋겠다.
대기업 오너들이 이 책을 읽으면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