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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Book

소금(박범신)

by 하트입술 2013. 8. 18.



소금박범신장편소설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지은이 박범신 (한겨레출판사,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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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으로 검색해서 국회도서관에서 빌린 책 <소금>

사전정보 전혀 없이 빌려서 읽은 책이었는데... 올 상반기에 읽은 책 중 손 꼽히는 책이었다.

<소금>은 한 염부의 죽음으로 시작이 된다.
대학생 아들만이 희망이었던 한 염부의 죽음.
그리고 그 아들의 일상에 찌든 삶과 우연한 계기에 그 삶이 아닌 타인의 삶을 살게 된 남자.

그 남자를 찾아 헤메이는 딸과
우연히 그 딸을 만난 후 자신의 방식으로 여자의 아버지를 찾는 한 남자.

염부인 아버지. 선기철.
세 딸과 부인의 지갑이 되어버린 아버지 그리고 피가 섞이지 않은 가족이 새로 생긴 아버지. 선명우.
자신의 생일날 갑자기 증발한 아버지를 찾는 딸. 선시우.

그리고 선시우를 돕는...
자식을 공부시키려다가 자신을 잃어버린 아버지를 가진 한 남자.

소설 <아버지>처럼 작정하고 울리려고 하진 않지만, 읽으면서 가슴이 많이 먹먹해진 소설 <소금>

'아버지'가 주제인데다가 소설의 주요 배경이 된 지역이 친가와 외가가 있는 지역이라 더 공감하며 읽을 수 밖에 없었다. 소설의 주 배경이 된 지역이 4곳 정도 되는데, 그 중 2곳이 친가와 외가라니... 신기할뿐.

소설을 다 읽고 난 후 부모님께, "박범신 소설을 읽었는데, 소설 배경이 친가랑 외가야!" 라고 말씀드리니,
 "박범신 고향이 논산(외가)이야! 자기 고향이라 소설 속 배경으로 했나보다!"라고 시크하게 말씀해 주신 부모님.

아... 그런거였구나. 박범신 고향이 논산이라 논산이 소설의 주 배경이 된거구나...
그러면 우리 친가인 지역은 왜 나온거지?

아직도 신기해 하고 있다. 친가와 외가가 한 소설 속에 주요 지역으로 나온 것이. 하하하!

서울은 이른바 문화의 드높은 '중심'이고 소비자본의 아름다운 '첨단'이나, 동시에 갈 길 모르는 망명자들의 감미로운 '피난처'이기도 했다. 나도 한때 그 분위기에 끼이고자 나의 고절한 시간들을 견딘 적이 있었다. 갈 길 모르던 망명자 시절의 이야기였다. '젊었을 때 우리는 배우고 늙었을 때 우리는 이해한다'는 잠언은 틀린 말이었다. 젊은이들이 화려한 문화의 중심에서 만 원씩 하는 커피를 마실 때, 늙은 아버지들은 첨단을 등진 변두리 어두컴컴한 작업장 뒤편에서 인스턴트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들고 있는 게 우리네 풍경이었다. 문제의 잠언은 '젊을 때 소비하고 늙을 때는 밀려난다'고 바꿔야 마땅했다. - 80~81 page

몇년 전 집에서 까르보나라 스파게티를 만들었었다. 저녁식사 시간에 만들어서 4식구가 함께 내가 만든 까르모나라 스파게티를 먹었는데, 그 때 난 아빠는 까르보나라 스파게티를 싫어할 것이라 예측 했었었다.

"아빠는 까르보나라 스파게티 싫어하겠지? 느끼하다고 안 드시면 어쩌지?" 하는 생각...

그런데 왠걸, 아빠는 까르보나라 스파게티가 맛있다며 매우 잘 드셨다. 그래서 아빠한테 "아빠 안 느끼해?"라고 물으니, "구내식당 양식매뉴로 종종 나와!"라고 말씀하시며, "아빠도 니네들 좋아하는 음식 먹을 줄 알아!"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곤 "아빠도 점심 먹으면 커피 한잔씩 사서 마시고 그래!"라고 하셨다.

난... 나도 모르게, 아빠는 이탈리안 음식도 안 먹고 아메리카노도 안 마시는 그런 어른으로 생각을 했던거다.
그래서 소설 속 저 구절이 더 짠했다. "젊을 때 소비하고 늙을 때는 밀려난다"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아빠는 새로운 것들을 소비하지 않는 사람으로 생각한 나.
시골 출신이긴 하지만, 학창시절부터 도시에서 살았고 누가 봐도 세련된 아저씨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아빠니깐 내가 하는 일상의 소비를 하지 않을거라 생각했다니...

시우는 당황했다.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해 나는 대체 무엇을 알고 있었단 말인가,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들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았는지, 낯선 타인보다 오히려 멀다고 느꼈다. "엄마! 아빠!" 그녀는 입속으로 불러보았다. 회한이 가슴을 쳤다. '엄마 아빠'라는 이름이야말로 사람들로서 당신들을 이해하는 길을 철저히 가로막고 있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엄마! 아빠!'라는 말속엔, 어머니와 아버지의 역할만이 들어 있을 뿐이었다. "사람이 아니무니다!" 코미디 프로를 흉내 내어 그녀는 중얼거렸다. 엄마 아빠이기 떄문에, 엄마 아빠의 사랑은 언제까지나 절대적일 것, 일방통행일 것이라고, 그들의 의견과 상관없이 오래전부터 결정되어 있었다. 거역할 권리가 엄마 아빠에겐 없었다. 그들은 거역할 수 없는 천리로서의 사랑을 지녀야 했고, 자식들은 그 사랑을 일방적으로 누릴 천리로서의 권리가 있었다. 성년식을 치르고 난 자식들도 그러했다.
"언니는 엄마 아빠가 누구라고 생각해?"
"누구? 그게 무슨 말이니. 그냥 엄마 아빠지."
"아냐, 선명우, 김혜란이야!"
이름을 불러보자 어머니 아버지에게 가는 가깝고 넓은 길이 뚫리는 느낌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평생 곁에 두고 살지 못한 아버지와 사랑하는 사람을 평생 곁에 두고도 다 갖지 못한 어머니가 측은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들은 어머니 아버지이기 떄문에, 다 큰 딸들에게도 철저히 '사람'으로서의 정보를 제한하면서, 오직 책임이라는 일므으로 당신들의 어둠을 견뎌온 것이었다. "스무 살이 넘으면 자식들도 엄마 아빠라고 하지 말고 선명우, 김혜란 씨, 이렇게 부르기로 하면 좋겠어!" 그녀는 말했고, 언니는 "그건 패륜이야!"하면서 콧방귀를 뀌었다. - 102~3 page

엄마, 아빠에 대해서 내가 아는 건 무얼까?
태어난 곳과 그들의 가족. 그리고 학력과 직장. 친한 사람들.

엄마와 아빠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살고 계신지 잘 모르는 것 같다.
이 구절을 읽고 난 후 생각을 해보니, 친구에 대해 아는 것 보다 부모님에 대해 아는 것이 더 적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랜 친구들... 특히 동네친구들의 경우는 대부분의 일상을 함께 했기에 그들의 많은 부분을 알고 있다.
친구들의 관심사, 친한사람들, 친구들의 가족과 친척들까지.
또한 오랜 친구들의 경우 그 친구들 개개인이 역사도 알고 있다. 어떤 일들을 겪고 자랐는지 말이다.

그런데 오히려 부모님의 삶의 궤적을 너무 모르는 것 같다.

어떤 책에선가 부모님의 자서전을 쓴다는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작년에 아빠 환갑, 내년에 엄마 환갑.
부모님의 역사를 알고, 그 역사를 글로 남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시도를 하면 부모님이 흔쾌히 응해주실까?

부모님의 자서전 출판. 요즘 생각하는 일 중 하나.

가난해서 아내와 딸들을 읺어버린 게 아니었다.
저축이 늘어나면, 아파트를 늘리면 행복해지는 줄 알았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죽어라고 일해 과장, 차장, 부장, 상무에 오르고, 그렇게 해서 늘어난 연봉, 늘어난 잉여 재산이 가져온 건 사랑의 황폐화뿐이었다.
가족은 차츰 그 자신을 다만 '통장'같이 취급했다.
아내는 물론이고 어린 딸들과도 따뜻이 지내던 시절의 짧은 추억들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가난했던 시절의 기억이었다. 그러나 잉여재산이 불어나면서 그는 차츰 그 모든 사랑의 관계를 잃었다.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그는 자신들을 소비의 괴물로 만들었을 뿐이었고, 아내와의 사랑 역시 서로 '빨대'를 꽂아 빠는 기능적 관계로 변모됐다. 그는 그래서 되도록 지역 축제에서 구한 토산품이나 특산물을 싼값에 팔아 이윤이 많이 남지 않도록 조절했고, 돈이 조금이라도 많이 생긴 날에는 맛있는 걸 사 먹는 데 다 썼다. - 247~8 page

선시우의 독백.
가족은 차츰 그 자신을 다만 '통장'같이 취급했다.

소비지향적인 사회에서 '통장'이 되어버린 아버지들....
안타까운 현실. 나 또한 아빠를 '통장'으로 생각해 왔던 것 같아서 죄송스러웠다. 아주 많이... ㅠ.ㅠ

그러나 그 남자는 '염부1'이 아니었다.
몰강스러운 햇빛을 견디면서 소금을 모으고 있는 늙은 남자는 어김없이 그의 아버지였고, 그곳은 들끓고 있는 자신의 조국 어느 변방의 작은 염전이었다. 그런저런 세계사의 변방에서 여전히 아무것도 인식 못한 채, 늙어가는 그 남자에게 오직 '빨대'를 꽂고 생명을 유지해온 것이 바로 그와 그 자신의 형제들이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빨대, 빨대였다. 그걸 어떻게 부정하겠는가. 그는 그래서 깨달았다. 자신의 졸업식에 오지 말라고 아버지에 말할 수 없다는 걸. 누구에게는 단지 하나의 이식일지 모르지만 아버지에게 그의 졸업식은 모든 인내의 끝이며 모든 희망의 집결체라는 걸.
안되!
그는 소리 없이 소리쳤다.
아버지는 내 졸업식을 봐야 해!
아버지에겐 당연히 그럴 권리가 있었다. 그 누구도 감히 아버지의 그 권리 행사를 멈추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는 곧 뒤덜아서 비틀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돌아보면 이편에 등을 보이고 오로지 소금을 거두고 있을 중년 남자가 있겠지만, 그 남자가 염부1이 아니라 아버지이기 떄문에 그는 도망자처럼 비틀거리며 소금 창고를 차례로 지나갔다. 굽잇길을 돌아서면서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아버지가 미끄러져 소금 더께 위로 엎어지는게 순간적으로 보였다.
그게 그가 본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달려가 아버지를 일으키고 대파를 대신 잡아야 할 일이었찌만 그러면 아버지의 마음이 더 아플 터, 그는 짐짓 엎어진 아버지를 외면하고 굽잇길을 재빨리 돌아 나왔다. 아버지로부터 멀리멀리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염전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걸어 읍내로 나왔꼬, 그 기롤 곧장 서울에 돌아왔다. 내일 아버지께 사각모를 쓴 나를 보여드려야 해. 당신은 그걸 볼 권리가 있어. 다른 건 사소한 일일 뿐이야, 오로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때 왜 아버지에게 달려가지 않았을까. - 315~6 page

소설의 첫 구절엔 염전에서 뜨거운 태양빛에 의해 사망한 염부가 등장한다.
그리고 뒤에는 그 염부가 누구였는지... 염부가 쓰러지던 장면을 묘사한다.

아버지 선기철이 쓰러지는 것을 본 선명우. 하지만 그것이 사망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기에...
자신이 염전일을 돕는 걸 그 무엇보다 싫어하는 아버지인지라 아버지가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도 발길을 돌린 선명우.

하지만 자신이 본 것은 아버지가 쓰러진 것이 아니었다. 돌아가신 것을 목격한거다.
소설 속이었지만... 선명우의 감정이 고스란이 느껴져 괴로웠다.
소설을 읽으며 감정이입하기...
감정이입이 잘 된다는 건. 그만큼 소설이 잘 쓰였단거겠지.

작가의 말 '생명을 살리는 소금'을 꿈꾸며

애당초 젊은이들에게 읽히고 싶어 시작한 소설인데, 정작 젊은이들에게 오히려 반발을 불러일으킬까 봐 걱정되는 대목이 많은 것이 딜레마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묻고 싶다. 이 거대한 소비 문명을 가로지르면서, 그 소비를 위한 과실을 야수적인 노동력으로 따 온 '아버지'들은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부랑하고 있는가. 그들은 지난 반세기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가. 아니, 소비의 '단맛'을 허겁지겁 쫓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 늙어가는 아버지들의 돌아누운 굽은 등을 한번이라도 웅숭깊게 들여다본 적이 있는가. 365 page


작가의 말까지 주옥같았던 <소금>

결국 박범신이 <소금>을 통해 하고 팠던 말은... 
"이 거대한 소비 문명을 가로지르면서, 그 소비를 위한 과실을 야수적인 노동력으로 따 온 '아버지'들은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부랑하고 있는가. 그들은 지난 반세기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가. 아니, 소비의 '단맛'을 허겁지겁 쫓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 늙어가는 아버지들의 돌아누운 굽은 등을 한번이라도 웅숭깊게 들여다본 적이 있는가." 이 말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의 굽은 등. 글 만으로도 눈물이 고이는 단어.

오늘 저녁엔 아버지의 굽은 등을 안아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