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주말.
감기몸살로 모든 약속을 뒤로하고 하루종일 집에서 딩굴거리며 책 읽기.
저녁식사를 한 후 침대에 앉아 <밑줄 긋는 여자>를 읽다가 주르르 눈물이 흘렀고, 눈물은 한동안 그치지 않았다.
외갓집 마당에서 절을 올리고, 외갓집 앞 큰길에서 노제를 지내고, 회한에 젖은 상주들은 화장지로 향했다. 외할머니의 관이 불 속으로 들어가려 할 때 장례 안내인이 말했다. "불이야!"하고 큰 소리로 세 번 소리치라고, 엄마는 흐느끼며 소리쳤다.
"엄마, 불이야! 엄마, 불이야! 어~엄마, 불이야!"
만 93년을 사신 자그마한 외할머니의 앙상한 육신은 그렇게 한 줌의 재로 화해서 가족납골당에 모셔졌다. 다행히 가족납골당은 전망이 좋다. 탁 트여서 남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외할머니는 답답한 걸 싫어하셨는데 다행이다. - 222~3 page
이 부분을 읽다가 왈칵 눈물이 났다. 외할머니, 큰외숙모...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다.
작년에 나는 2번의 상을 치뤘다. 6월 외할머니 상, 그리고 12월 큰외숙모 상.
외할머니는 아흔여섯의 나이에 세상을 뜨셨다. 그 전부터 편찮으셔서 어느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던 죽음인지라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땐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는 외할머니를 못 보는구나... 하는 정도의 슬픔이었다.
하지만, 큰외숙모가 돌아가셨을 때는 달랐다.
아직도 선명히 기억나는 2011년 12월 29일.
아침에 출근을 하기 위해 9호선 국회의사당역에서 내려 현대카드 앞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때 아빠한테 전화가 왔다.
아빠는 "오늘 늦니?"라고 물었고, 나는 아빠의 물음에 "연말인데 당연히 늦지! 저녁약속있어요!!"라고 대답을 했다. 뒤이어 들려온 아빠의 말 "큰외숙모 새벽에 돌아가셨데, 오늘은 일찍 들어와라..."
머리가 띵 했다. '큰외숙모가 돌아가셨다니? 갑자기 큰외숙모가 왜 돌아가셔? 말도 안되...' 그 생각을 하며 출근을 했고... 출근을 해서는 멍~하니 앉아있다고 오전 근무만 하고 사정을 말씀드리고 조퇴를 해서 큰외숙모를 모신 강남성모병원으로 갔다.
가는 길에도 난 큰외숙모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했다. '말도 안되! 말도 안되!'란 생각만 반복할 뿐...
병원을 가니 이미 다른 식구들은 모두 와 있었고... 큰외숙모의 영정사진을 보고난 후 큰외숙모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영정사진 속에서 환히 웃고 있는 큰외숙모.
그리고 상주노릇을 하고 있는 큰외삼촌과 사촌오빠들 사촌언니... 사촌오빠와 사촌언니는 많이 울었는지 상기되어 있었고... 그 모습을 보며 나도 눈물이 났다.
그렇게 삼일장을 치루고 12월 31일 큰외숙모는 한줌의 재가되어 납골당에 모셔졌다.화장지에서 큰회숙모가 한줌의 재가 되는 동안 난 의자에 앉아서 혼자 하염없이 울었다. 자식도 아닌데 조카가 너무 많이 우는 것이 창피해서 숨어서 혼자 펑펑 울었다. 큰외숙모가 이렇게 빨리 돌아가실 줄 알았다면... 조금 더 잘해드릴걸~ 조금 더 자주 찾아갈걸... 앞으로 많은 시간이 있을 줄 알았고, 그래서 큰외숙모가 베푼 사랑을 단 1%도 갚지 못했다. 그게 너무 죄송해서 계속 울었다.
큰외숙모... 어릴 땐 몰랐다 큰외숙모가 날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그냥 큰외숙모니깐 큰외숙모가 해주시는 모든 일들이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만났다 헤어질 때면 항상 주셨던 용돈. 그리고 "우리 슬기가 제일 예뻐!"라는 말들... 그냥 조카니까, 조카기 때문에 하는 말인줄 알았었다. 의례히 인사치례로 하는 말.
그런데 그게 정말 큰외숙모의 진심이었다는 것을 대학생 때 알게 되었다. 큰외숙모는 그냥 조카니깐 예의상 날 예뻐했던 것이 아닌 진심으로 날 사랑해 주셨다는 것을 말이다.
사촌언니네 집에 놀러갔던 날, 사촌언니가 밥을 먹다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엄마는 니가 제일 예쁘데~ 예진(사촌언나 딸)이 보고도 슬기만큼 예쁘다라고 하시더라 그 말듣고 기호가 슬기 하나도 안 예뻐!"라고 했더니 엄마(큰외숙모)가 슬기가 제일 예쁘다고 하던걸~!"
그 때 알았다. 매일 만날 때 마다 우리 슬기가 제일 예쁘다고 제일 예쁘다고 하던 그 말이 인사치레가 아닌 큰외숙모의 진심이었던 것을... 자신의 친조카도 아니고... 남편의 조카인데~ 그렇다고 내가 정말 예쁘게 생긴 것도 아닌데 자신의 친손주만큼이나 날 예뻐해주셨던 큰외숙모.
내가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하면, 어떤 사람인지 꼬치꼬치 묻고 생년월일 알아오라고 시켜서 나랑 남자친구의 사주까지 봐주시던 큰외숙모... 결혼까지 하려고 마음먹었던 사람이 나와 사주가 좋지 않았는데 그 당시에는 말도 못하고 계시다가 헤어지고 난 후 말해주셨던 큰 외숙모.
큰외숙모한테 난 받은것만 있는데... 제대로 해드린 것도 하나 없는데, 이제 무언가 해드릴 수 있게 되니 돌아가버리셨다. 아프다고 미리 이야기좀 해 주셨으면 병문안이라도 갔을텐데... 왜 못 알리게 해서 마지막 모습 조차 보지 못하게 하신건지... 정말 사랑한다고, 감사하다고 말할 수 있는 기회도 주지 않고 그렇게 가버리신건지...
큰외숙모가 돌아가시고 난 후 생각해 보니 큰외숙모와 함께 찍은 사진 조차 없었다. 그렇게 자주 식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행이 아직은 큰외숙모 얼굴이 또렷히 기억이 난다. "슬기야~"하고 부르던 큰외숙모의 목소리도 억양도 그대로 기억이 난다. 근데 그런 큰외숙모를 이제 볼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프다.
큰외숙모가 돌아가신지 이제 1년. 아직도 문득문득 큰외숙모 생각이 난다. 그리고 많이 보고 싶다.
내리 사랑이 뭔지 알려주신 분. 부모님 다음으로 날 사랑해 주신 분.
근데 그 사랑을 뒤늦게 알아 주신 사랑을 되돌려드리지 못한 분.
그래서 생각하면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너무나 보고 싶은 분.
꿈에서라도 보고 싶은데... 아직 꿈에서도 보지 못한 분.
사랑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큰외숙모.
감기몸살로 모든 약속을 뒤로하고 하루종일 집에서 딩굴거리며 책 읽기.
저녁식사를 한 후 침대에 앉아 <밑줄 긋는 여자>를 읽다가 주르르 눈물이 흘렀고, 눈물은 한동안 그치지 않았다.
외갓집 마당에서 절을 올리고, 외갓집 앞 큰길에서 노제를 지내고, 회한에 젖은 상주들은 화장지로 향했다. 외할머니의 관이 불 속으로 들어가려 할 때 장례 안내인이 말했다. "불이야!"하고 큰 소리로 세 번 소리치라고, 엄마는 흐느끼며 소리쳤다.
"엄마, 불이야! 엄마, 불이야! 어~엄마, 불이야!"
만 93년을 사신 자그마한 외할머니의 앙상한 육신은 그렇게 한 줌의 재로 화해서 가족납골당에 모셔졌다. 다행히 가족납골당은 전망이 좋다. 탁 트여서 남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외할머니는 답답한 걸 싫어하셨는데 다행이다. - 222~3 page
이 부분을 읽다가 왈칵 눈물이 났다. 외할머니, 큰외숙모...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다.
작년에 나는 2번의 상을 치뤘다. 6월 외할머니 상, 그리고 12월 큰외숙모 상.
외할머니는 아흔여섯의 나이에 세상을 뜨셨다. 그 전부터 편찮으셔서 어느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던 죽음인지라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땐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는 외할머니를 못 보는구나... 하는 정도의 슬픔이었다.
하지만, 큰외숙모가 돌아가셨을 때는 달랐다.
아직도 선명히 기억나는 2011년 12월 29일.
아침에 출근을 하기 위해 9호선 국회의사당역에서 내려 현대카드 앞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때 아빠한테 전화가 왔다.
아빠는 "오늘 늦니?"라고 물었고, 나는 아빠의 물음에 "연말인데 당연히 늦지! 저녁약속있어요!!"라고 대답을 했다. 뒤이어 들려온 아빠의 말 "큰외숙모 새벽에 돌아가셨데, 오늘은 일찍 들어와라..."
머리가 띵 했다. '큰외숙모가 돌아가셨다니? 갑자기 큰외숙모가 왜 돌아가셔? 말도 안되...' 그 생각을 하며 출근을 했고... 출근을 해서는 멍~하니 앉아있다고 오전 근무만 하고 사정을 말씀드리고 조퇴를 해서 큰외숙모를 모신 강남성모병원으로 갔다.
가는 길에도 난 큰외숙모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했다. '말도 안되! 말도 안되!'란 생각만 반복할 뿐...
병원을 가니 이미 다른 식구들은 모두 와 있었고... 큰외숙모의 영정사진을 보고난 후 큰외숙모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영정사진 속에서 환히 웃고 있는 큰외숙모.
그리고 상주노릇을 하고 있는 큰외삼촌과 사촌오빠들 사촌언니... 사촌오빠와 사촌언니는 많이 울었는지 상기되어 있었고... 그 모습을 보며 나도 눈물이 났다.
그렇게 삼일장을 치루고 12월 31일 큰외숙모는 한줌의 재가되어 납골당에 모셔졌다.화장지에서 큰회숙모가 한줌의 재가 되는 동안 난 의자에 앉아서 혼자 하염없이 울었다. 자식도 아닌데 조카가 너무 많이 우는 것이 창피해서 숨어서 혼자 펑펑 울었다. 큰외숙모가 이렇게 빨리 돌아가실 줄 알았다면... 조금 더 잘해드릴걸~ 조금 더 자주 찾아갈걸... 앞으로 많은 시간이 있을 줄 알았고, 그래서 큰외숙모가 베푼 사랑을 단 1%도 갚지 못했다. 그게 너무 죄송해서 계속 울었다.
큰외숙모... 어릴 땐 몰랐다 큰외숙모가 날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그냥 큰외숙모니깐 큰외숙모가 해주시는 모든 일들이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만났다 헤어질 때면 항상 주셨던 용돈. 그리고 "우리 슬기가 제일 예뻐!"라는 말들... 그냥 조카니까, 조카기 때문에 하는 말인줄 알았었다. 의례히 인사치례로 하는 말.
그런데 그게 정말 큰외숙모의 진심이었다는 것을 대학생 때 알게 되었다. 큰외숙모는 그냥 조카니깐 예의상 날 예뻐했던 것이 아닌 진심으로 날 사랑해 주셨다는 것을 말이다.
사촌언니네 집에 놀러갔던 날, 사촌언니가 밥을 먹다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엄마는 니가 제일 예쁘데~ 예진(사촌언나 딸)이 보고도 슬기만큼 예쁘다라고 하시더라 그 말듣고 기호가 슬기 하나도 안 예뻐!"라고 했더니 엄마(큰외숙모)가 슬기가 제일 예쁘다고 하던걸~!"
그 때 알았다. 매일 만날 때 마다 우리 슬기가 제일 예쁘다고 제일 예쁘다고 하던 그 말이 인사치레가 아닌 큰외숙모의 진심이었던 것을... 자신의 친조카도 아니고... 남편의 조카인데~ 그렇다고 내가 정말 예쁘게 생긴 것도 아닌데 자신의 친손주만큼이나 날 예뻐해주셨던 큰외숙모.
내가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하면, 어떤 사람인지 꼬치꼬치 묻고 생년월일 알아오라고 시켜서 나랑 남자친구의 사주까지 봐주시던 큰외숙모... 결혼까지 하려고 마음먹었던 사람이 나와 사주가 좋지 않았는데 그 당시에는 말도 못하고 계시다가 헤어지고 난 후 말해주셨던 큰 외숙모.
큰외숙모한테 난 받은것만 있는데... 제대로 해드린 것도 하나 없는데, 이제 무언가 해드릴 수 있게 되니 돌아가버리셨다. 아프다고 미리 이야기좀 해 주셨으면 병문안이라도 갔을텐데... 왜 못 알리게 해서 마지막 모습 조차 보지 못하게 하신건지... 정말 사랑한다고, 감사하다고 말할 수 있는 기회도 주지 않고 그렇게 가버리신건지...
큰외숙모가 돌아가시고 난 후 생각해 보니 큰외숙모와 함께 찍은 사진 조차 없었다. 그렇게 자주 식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행이 아직은 큰외숙모 얼굴이 또렷히 기억이 난다. "슬기야~"하고 부르던 큰외숙모의 목소리도 억양도 그대로 기억이 난다. 근데 그런 큰외숙모를 이제 볼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프다.
큰외숙모가 돌아가신지 이제 1년. 아직도 문득문득 큰외숙모 생각이 난다. 그리고 많이 보고 싶다.
내리 사랑이 뭔지 알려주신 분. 부모님 다음으로 날 사랑해 주신 분.
근데 그 사랑을 뒤늦게 알아 주신 사랑을 되돌려드리지 못한 분.
그래서 생각하면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너무나 보고 싶은 분.
꿈에서라도 보고 싶은데... 아직 꿈에서도 보지 못한 분.
사랑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큰외숙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