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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다시 돌아가고 싶은 곳

by 하트입술 2012. 3. 22.

대학교 4학년 때, 학교 홈페이지에서 색다른 게시물을 발견했었다.  "국회 인턴 모집"이라는 제목의 글...

국회에서 인턴을 뽑아? 하는 호기심에 그 글을 클릭해 보았고,
여성유권자연맹이라는 곳에서 대학생들을 뽑아서 국회에서 인턴을 경험하게 해 준다는 공지글이었다.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고 막연히 정책관련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만 했을 뿐,
석박사도 넘쳐나는 시대에 학부를 막 졸업한 학부생을 정책영역에서 뽑는일은 거의 없단 걸 알았던 그 때.
이거 잼있겠는걸~ 이런 마음가짐으로 원서를 냈었다.

토요일 원서 마감이었었는데.. 사진도 채 첨부하지 않은 이력서와 자소서를 이멜로 제출했었고..
사진을 첨부하지 않았다는 걸, 주일날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다 떠올려, 원서마감이 지난 일요일 사진을 첨부한 파일을 재전송했다. 마감 기한을 넘겨서 제출한데다가, 경쟁률도 8:1이 넘어 포기하고 있던 어느날...

합격했다는 문자가 도착했다. 그렇게 여성유권자연맹에서 주관하는 국회관련 교육을 받고.
난 열린우리당 비례대표 1번이었던 장향숙의원실에 배치가 되었다. 복지위를 원했었는데, 결국 그렇게 된 것.

                             ▶  2004년 7월 16일 장향숙의원실 첫 출근 하던날 찍은 본청 사진

그렇게 2004년 7월부터 10월까지 일주일에 3번씩 국회 의원회관 221호 장향숙의원실로 출근하며 일을 배웠다. 
공문쓰기, 복지부에 자료요구하기, 보도자료 쓰기 등... 당시 나에게 주어진 임무는 결식아동지원 현황 파악하기...

복지부를 통해서 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직접 16개 시군구에 전화를 해서 자료요구를 했다. 
그리고 도착한 자료들.. 그 자료들을 바탕으로 명신비서관님은 질의서를 쓰셨고, 난 졸업논문을 썼다. 
'결식아동 지원체제의 현황과 개선방안' 성욱이와 함께 쓴 논문은 수정없이 한번에 통과되었고, 우수논문에 뽑혀 사회복지연구 38호에 실리고 상금까지 받았다. 

2004년 가을~ 17대 국회에서의 치열했던 첫 국감이 열리던 그 때. 
내가 국회에서 본 것은 멱살잡고 싸우기만 하는 국회의원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정부 정책의 문제점을 분석하기 위해 자료를 붙잡고 씨름하는 보좌진, 국민에게 더 필요한 정책을 생산하기 위해 노력하는 보좌진, 집에 들어가는 것도 잊은 채 매일 의원실 라꾸라꾸침대에서 자면서 일에 매진하면서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국회의원 보좌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때 사회복지 정책은 비단 연구소뿐만 아니라 국회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처음 했으며... 
단지 4개월 옆에서 거들떠 본 경험만을 가지고 국회에서 내 꿈을 펼치리라(?)라는 다짐을 하게 됬다. 

그렇게 장향숙의원실의 무급인턴 생활을 마치고, 난 졸업을 코앞에 둔 4학년으로서 취업을 위해 이력서를 쓰기 시작했다. 
국회에 유급인턴제도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경원의원실에 원서를 냈다가 서류전형에서 탈락하고...
정책 담당자를 뽑는다는 말에 아무런 사전정보도 없이 지원했던 한국장애인재활협회에 한번에 입사를 했다. 
그러나 정작 입사를 한 후 나에게 맡겨진 업무는 기획 및 홍보 업무. 정책업무는 석사를 졸업한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다. 

스스로 글 쓰는 재주가 있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으나, 재활협회에서 이인영팀장님 밑에서 보도자료 쓰기부터 하나씩 배워나갔고.. 어느새 협회의 모든 보도자료, 축사 등 원고들은 다 내가 쓰고 있었다. 물론 내 사업도 진행하면서...

그렇게 1년이 지나고 나니. 협회란 곳이 나와는 잘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보건복지부 산하기관이고, 정규직이라 내가 그만두지 않는 한 평생직장이 보장되는 곳이었지만...
단지 4개월 경험한 국회가 너무나 그리워, 정규직으로 근무하던 한국장애인재활협회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다시 들어간 곳은 신상진의원실. 유급인턴으로 들어갔지만, 월급은 첫직장의 1/2.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회에서 내가 하고싶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했었다. 
하지만, 장향숙의원실과 너무나 다른 분위기...
그리고 보건복지위를 갈 예정이라고 해서 당시 환경노동위원회였지만 지원했던건데.. 그대로 환경노동위원회.

신상진의원실에 들어간지 4개월 만에 다시 한번 결단을 내렸다. 
보건복지위원회를 찾아. 백원우의원실 유급인턴으로 이직. 

운 좋게도 백원우의원실은 정책담당자가 6급 비서였던 연진언니와 인턴인 나 뿐.
그리고 의원님 또한 정책에 관해서는 너희가 하고 싶은대로 해보라며 크게 터치하지 않았다. 

연진언니는 보건 그리고 나는 복지. 
신나게 이 정책, 저 정책 조사하고 분석하고, 그래서 질의서를 쓰고 보도자료를 내고. 
여름 휴가도 반납한 채, 추석 연휴에도 추석 당일에만 출근하지 않고 매일 출근하며~ 즐겁게 국정감사를 준비했다. 

                                   ▶ 2007년 10월 8일 PM 12:30 출근, 9일 PM 15:30 퇴근..(주말에 27시간을 사무실에서)
 
고작 100만원 밖에 안되는 월급을 받으며, 스스로 주말과 휴일을 반납하고...
매일 야근하는 모습. 그런 모습을 보며 누군가는 일 중독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미친짓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과도한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나 피로보다는, 일에서 얻는 성취감이 더욱 컸다. 
그래서 그렇게 일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다른 의원실에서는 4~5명이 매달려서 준비하는 국정감사를 단 둘이 잘 치러내고나니.. 더 이상 무서울 것이 없었다. 스스로 한계를 깨버린 것 같은 그런 느낌?

그래서 모교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것도 주간인 일반대학원. 
합격을 하고 의원님께 말씀드리니 다행이도 흔쾌히 업무를 빠지고 수업을 가는 것을 허락해 주셨고. 
그렇게 대학원을 입학하여 일과 학업을 병행했다. 

내 생에 가장 치열하고 부지런하게 살았던 그 때. 
매일 18시 20분 국회에서 여의도역을 가는 버스를 타고 여의도역에 가서, 집에 오면 7시 40분. 
20분만에 씻고 밥 먹고 바로 책상에 앉아서 대학원 과제를 위해 원서 읽기...
항상 시간에 쫒기고, 3~4시간도 채 못자면서, 그러면서도 행복했다. 내가 하고픈 일을 할 수 있기에.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연진언니가 대선캠프로 가면서 사직을 하고..
모두 지역사무실로 총선준비를 위해 내려간 후 혼자 덩르거니 사무실을 지키며 모든 업무를 수행하기. 
그렇게 6월 임시국회에서 장관인사청문회, 한미FTA 청문회, 각종 법안 검토까지...
단지 인턴의 신분으로 모든 업무를 소화하면서 의원실에 많은 실망을 했다. 

당시 6급으로 승진을 꿈꿨던건 아니다. 연진언니처럼 좋은 사람이 온다면.. 당연히 받아들이려 했으나...
나보다 실무경험이 없는 사람들. 심지어 국회 경력이 전혀 없는 사람을 단지 남자라고 박사라고 
그리고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뽑아서 나보고 국회업무를 가르치라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직서를 냈다. 아직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여자라는 이유로 승진이 안 된다면... 전문성을 갖추고 다시 오리라. 

국회를 그만두고 사회생활을 하며 익힌 글재주를 가지고 대학원신문사에서 일하게 되 전액장학금을 받으며 대학원을 다녔고.
어느덧 석사 수료가 되었다. 이젠 논문만 쓰면 되는 상황. 

2008년 18대 국회가 들어서고, 계속해서 국회를 주시하고 있었다. 
보건복지위원회에 급수가 있는 자리만 나면 들어가리라. 그러나, 자리는 쉽게 나지 않았다.
국회에서 근무하는 정책비서, 정책비서관 언니들도 빨리 들어오라 성화였지만...
다시 인턴으로 들어가긴 싫었다. 그리고 국회에서 안 모든 사람들이 다시 인턴은 하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기다리던 중 드디어 보건복지위원회 6급비서 공지가 난 것을 발견해 어제 원서를 접수했다. 
이력서를 쓰다보니, 난 아직도 만 27세. 공무원 6급이 되기 이른 나이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충분히 6급 정책비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자신한다. 
혹여 이번에 안되더라고. 더 좋은 기회가 올 것이라 믿는다. 

내가 만든 정책으로 인해 사회적 약자가 행복한 사회가 되는 것. 이게 나의 작은(?) 소망이자 목표이다. 

그리고 오늘도 난 내 소망을 이루기 위해 한발자국씩 다가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