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태어나서 서울에서만 30년을 살았지만, 서울 안에 가보지 못한 곳이 너무 많다. 3살 때 부터 지금 까지 살고 있는 명일동. 대학 시절을 보낸 흑석동. 회사가 있는 여의도. 그리고 잠실, 강남, 압구정, 청담, 종로, 대학로, 신촌, 홍대, 명동, 대학로... 내가 자주 오가던 곳들.
내 근거지와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가는 번화가... 그 외의 곳들은 가본 적이 별로 없다. 서울 토박이 임에도 불구하고...
불과 몇년 전만해도, 다른 지역에 대한 호기심이 없었다. 항상 내가 다니는 곳들이 편안했고 그 외의 곳들을 가려고 생각하지도 노력하지도 않았다. 자주 가는 밥집, 자주 가는 카페, 자주 가는 술집. 익숙한 공간들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었다. 그리고 공원 같은 자연 친화적인 공간 보다는 왁자지껄 복닥이는 건물 안이 더 좋았다.
그런데 요 몇년간 건물 안 보단 밖이 좋고, 복잡한 번화가보단 조용한 골목길이 좋아졌다.
그러고 보니 서울 안에 내가 안가본 곳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래서 가보고 싶었다. 내가 안 가본 곳들을....
그 중 정말 가보고 싶었던 곳 중에 하나. 낙산공원...
대학로는 자주 갔었지만, 대학로 근처에 낙산공원이 있는 것은 모르고 있었었다.
그래서 대학로에서는 항상 연극을 보고 밥을 먹고 커피나 술을 마시고... 그 정도 뿐이었다.
주변에 낙산공원이 있는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었던 나.
그런 내게 낙산공원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소설 한편이었다.
작년 여름 휴가지에서 본 소설 한편. 신경숙 작가의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그 책에 '낙산'이 나왔다. 그것도 아주 빈번하게...
주인공들이 걷던 낙산 성곽길. 그 길에 대한 자세한 묘사..
그 길을 걷고 싶었다. 그러나 소설을 읽은 후 어영부영 '낙산'은 잊혀졌고.. 그렇게 1년여의 시간이 흐른 후 드디어 낙산 공원을 갔다.
추석 당일. 국정감사를 준비하다가 단 하루 쉬었던 그날. 식사를 하고, 연극을 보고 커피를 마신 후 간 낙산공원.
성곽에 앉아 한참을 있었다. "저기는 어느 방향, 저기는 어느 방향", "저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은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여기 생각보다 많이 높네, 떨어지면 죽을까?" 이런 대화를 하면서 말이다.
성곽에 올라가서 앉을 때는 조금 무서웠는데, 앉아 있으니 높다는 느낌이 별로 안 들더라.
오래간만에 여유로웠던 그 시간. 국정감사가 끝나면 다시 여유로워 질 수 있겠지?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에 나온 낙산 관련 부분.
우리는 낙수장을 따라 마로니에공원을 벗어나 내가 늘 내 옥탑방에서 바람나 보던 낙산을 향해 발걸음을 뗐다. 방향이 바뀌니 사촌언니가 살고 있는 곳이 어디쯤인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이 도시에 이런 동네가 있었어? 누군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가다가 이 길 어디가 성곽하고 이어진다는 거야? 의심하는 이도 있었다. 낙산은 화강암으로 덮여 있다고 낙수장이 말했다. 산이 꼭 낙타의 등같이 생겼다는 낙수장의 말을 들으며 나는 늘 바라보기만 했던 낙산 쪽에 서서 반대로 내가 사는 옥탑방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서의 내 모습이 마치 다른 사람의 움직임처럼 떠올랐다. 테이블야자에 물을 주거나 학교로 가기 위해 운동화 끈을 조여매거나, 이따금 깊은 밤에 옥상으로 나와 어린 시절 마당에 선을 긋고 네모 칸에 돌을 던지고 한쪽 발을 들고 그 돌을 집어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며 놀았던 것처럼 어둠 속의 옥상에 금을 그어놓고 돌을 던지고는 성큼성큼 뛰어보곤 했던 내 모습이.
낙산에서 내가 사는 옥탑방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그가 홀로 떨어져 있는 내게 다가왔다. 내 귓가 가까이에서 그가 혼잣말하듯 말했다.
- 좋아해 정윤.
그의 갑작스런 고백에 나는 옥탑방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불쑥 한마디가 툭 튀어나왔다.
- 윤미루 만큼?
그가 내가 보는 곳을 함께 바라보며 대답했다.
- 내 십 년 후를 생각할 때만큼.
- 윤미루만큼?
....................
그.때.의.그.절.망.만.큼. 이라는 그의 목소리가 물처럼 스며들어 내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왜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은 기쁨이지만은 않을까. 왜 슬픔이고 절망이기도 할까. 나는 성벽에 대고 있던 손을 거두고 일행들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그가 내 이름을 불렀을 때 나는 그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이미 알았다. 그를 향해 돌아섰다.
- 오늘을 잊지 말자. 이 말 하려고 그랬지?
그의 짙은 눈썹이 위로 치켜지고 곧 입가에 쑥스러운 웃음이 번졌다. 그가 다가와 내 손을 쥐었다. 나는 손을 빼서 그의 손을 더 힘껏 쥐었다. 오늘을 잊지 말자. 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울적해져 있었다. 상실될 걸 알고 있는 이의 고독이 묻어 있었다. 십 년 후, 이십 년 후... 그때의 우리는 어떤 모습일지. 마음이 복잡해져 나는 그의 손을 더 세게 쥐었다. 그가 손을 빼더니 내 손을 더 세게 쥐었다.
-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153~8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