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경린. 대학 때 빠져 있던 소설가...
공지영 작가의 소설을 연타로 2권을 읽은 후 전경린 작가의 소설을 찾아 읽었다.
예전에 안 읽었던 소설 <아무곳에도 없는 남자>
그런데 이 책. 그간 내가 읽어왔던 전경린의 소설과는 조금 달랐다.
노동운동을 하는 남자친구이자 자기 아들의 아빠인... 지금도 노동현장에서 가명을 사용하며 정수라는 여성노동자와 살고 있는 태인.
지방의 작은 출판사에서 일을 하는 이나.
그런 이나를 사랑하는 출판사 사장 서현...
그들의 이야기...
80년대 시대상이 확연히 드러나는 그런 소설.
그 시대를 겪지 않은 나는 그래서 조금은 낯설었던 소설.
하지만... 중간중간 공감가는 부분은 많았던 그런 소설. ^^
그 동안 이나는 참으로 많은 사람을 만났다. 한결같고, 동시에 각양각색인 사람들. 그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만의 거울로 자신과 세상을 비추어보고 있었다. 오만하고 명백하고 합리적인 사람들. 아무도 혼란을 겪는 것 같지 않았다. 그들은 혼란이 스며들 여지가 없도록 재빨리 자기 논리를 설정함으로써 보호벽을 마련하는 것이다. 세상은 공기로 채워진 것처럼 아집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제 이나는 그런 종류의 사람을 단 한 사람도 더 만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어떤 사람도 더 알고 싶지 않았고, 더구나 그 사람들에게 질문을 넣고 그들이 하는 말을 받아 적는 일 따윈 결코 다시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정서현의 감정도 더이상 모르는 척할 수는 없었다. 이나는 그가 얼굴을 부볐을 때 자신의 코와 뺨과 입술 위에 묻던 타액의 냄새를 떠올렸다. 어떤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이란 자주 바라보고 싶고, 함께 있고 싶고, 음성을 듣고 싶어하며 몸을 접촉하고 싶어하게 된다. 그러나 어떤 남자가 한 여자를 원하는 그것이 자신과 무슨 상관인가. 이나는 그에 관해 전혀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더구나 정서현은 미안하게도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 아버지를 상기시키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잠시 친밀감을 느꼈다면, 그건 육친적인 따스함과 이질적인 타인에 대한 감정 사이에서 애써 경계심을 가져야 하는 연민과 슬픔 같은 것일 뿐이었다. - 91~2 page
자신만의 거울로 자신고 세상을 비추고 잇는 사람들.
오만하고 명백하고 합리적인 사람들. 나 또한 그리 살고 있는거겠지? 하하하!
"그를 기다리는 거요?"
"아뇨. 난 아무도 기다리지 않아요. 그리고 결혼하지도 않을거에요. 우서은 혼자서 사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아지도록 나를 단련할 거에요. 생에 대해 강한 존재가 되고 싶어요. 막연한 두려움이 없는 사람.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운명이 나를 어느 곳에 데려다 놓아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는 그런 사람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
"아직 그를 사랑하니?"
이나는 무릎을 싸안고 고개를 다리 사이에 박았다.
"몰라요. 다만, 우린 아직 끝까지 사랑하지 못했어요. 말하자면, 전 여전히 그에 관하 시시각각 고통을 느껴요."
"왜 하필이면 그런 사랑이지? 왜 하필 그런 사랑을 하는 거야? 힘겨울 것이 뻔한 사랑을?"
이나가 고개를 수그렸다. 왜 사랑하는지, 그런 것은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 사랑한다는 것조차, 아무 목적도 없는 하나의 생각이 된 것 같았다. 이나의 눈 속이 천천히 붉어졌다. 그러나 눈물 따윈 흐르지 않았다. 이나는 다시 바위 위에 자처럼 길고 납작하게 드러누워 맑은 하늘을 향해 눈을 커다랗게 떴다. 해를 똑바로 바라보아도 이상하게 눈부시지가 않았다. 해를 보다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면 공중에 멍처럼 푸른 바퀴들이 빙글빙글 도는 게 보였다. - 225 page
왜 사랑하는지. 그런 것은 누구도 알수 없는 일이었다.
왜 사랑하는지... 왜 사랑하는지... 왜 사랑하는지...
"그래, 나도 한땐 투사였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냐? 킬킬...... 그건 이런거야. 그 당시엔 나 같은 백수가 민중이라는 이름으로 시간 죽이기 딱 좋은 곳이 그런 데였다, 이런 말씀이지. 잔치상에 파리 꼬이듯이 말이야. 비비적거리면서 시간도 죽이고 투사 대접도 받고, 밖에 나가서 심각한 척하면서 썰 풀 것도 있고. 화류계 여자들도 그 화제를 좋아했고...... 괜찮은 시절이었지. 이제 좋은 시절은 지았어. 잔치판은 끝났다구. 화류계 여자들도 그런 화제는 지겨워해."
그 말과 동시에 곁에 앉아 있던 상기가 'ㄷ'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상기는 두 주먹을 몇 차례 가격하고 마지막으로 정강이를 걷어차 'ㄷ'을 쓰러뜨려버렸다.
"이제 여기도 오지 말아요. 당신 말대로 잔치 끝났으니까, 얻어먹을 것도 더 없잖아."
술에 취했는데도 'ㄷ'은 날렵하게 일어섰다.
"왜? 재미있잖아? 아직은 구경거리가 있다구. 요즘 명물은 다 잔칫집 출신들이잖아. 화는 왜 내? 억울한 거 있어? 그럴 거 없어. 너도 나도 머리 위로 인생이 지나가버렸다고 생각하면 돼. 지나간 거지. 한땐 괜찮았잖아? 우리 모두 시대의 어둠을 틈 타 한가닥씩 한 거 아니겠어? 거리의 주인공, 광장의 주인공들. 그런 때가 아니면 누가 우리보고 자리 비워주었겠냐? 공순이 공돌이들이 이마에 핏대 세우고 거리에서 펄쩍펄쩍 뛰고, 그걸 보고 잘 한다고 누가 신문에 내줬겠느냐고? 이제 우리 인생은 막 내린거야. 우리 같은 종자들은 어두을 때나 필요한 것들이지. 봐라, 세상 바뀌니까, 어디서 저렇게도 시퍼렇게 살아 있었는지 다들 생생하게 폼잡고 나와 제 자리에 척척 걸쳐앉았잖아? 멋져, 아주 멋진 세상이라고." - 259 page
'그래. 그뿐이야. 역사의 어두운 밤이었고, 길이 나를 데리러 왔지. 난 피하지 않고 그 길에 응답했어. 길이 나를 데리러 왔기에......' - 289 page
80년대 운동권들... 386세대라 불리는 그들~
그들 중 일부는 국회에서 국회의원을 하고 있고...
일부는 강남에서 논술학원을 하고 있고...
또 일부는 태인과 같이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후 어딘가를 헤매이고 있을지도;;;
조금은 난해했던... 그러나 있을법도 한 그런 소설.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