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계열의 평생교육센터에 다니는 나(지혜). 그리고 동갑의 남자 규옥
다빈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 그떄랑 완전히 다른 사람이야. 물론 아이 있고 가정 꾸려서 행복하지, 뿌듯하고. 근데 어떻게 달라졌냐 하면 일단 사람이 엄청 보수화됐어. 아이 안전이 최우선이고, 내 가족 살길이 최선이고. 별거 아닌 걸로 구청에 민원 넣고 경찰서에 신고전화 걸고 그런다니까. 뭐, 애 재워야 되는데 밖에서 고등학생들이 고성방가로 노래 부른다는 이유 같은걸로. 그게 불과 몇 년 전에 정확히 내가 하던 짓인데 말이야...... 너 사람이 언제 어떻게 보수화되는지 알아? 명백한 자기 재산이 생길 때야. 절대 빼앗기거나 침해될 수 없는 것, 집이나 돈이나 그럴듯한 밥그릇이 생길 때. 근데 나한텐 그게 애야. 그런 게 생기면 있지, 이 세상이 갑자기 다 되게 위험해 보인다? 코웃음 치며 부렸던 객기는 다 증발하고, 교통사고, 전쟁, 사이코패스, 환경호르몬, 미세먼지 그런 것만 생각하게 돼. 그리고 나는 집 밖으 몹쓸 것들로부터 가족과 재선을 지켜야 하는 투사가 되는거야. 그러다 보면 점점 보수화되지. 나와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을 이해하기 힘들어지거든. 기본적으로 팔짱 탁 끼고, 걸려봐 된통 쏘아줄테니까, 이 마인드야. 왜 이렇게 된건지...... 나도 참 젊은 나이인데. 워홀 갔다가 웜홀에 빠진 줄 알았는데 이젠 블랙홀이다." - 101page
다빈이가 내 눈빛을 느꼈는지 잠깐 멈추고 이렇게 말했다.
"너는 시간 많아서 좋겠다. 너만 생각할 시간."
좋겠다, 같은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너는 애도 있고 집도 있고 돈 벌어다주는 남편도 있잖아. 나만 생각하는 시간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그래서 더 외롭고 무서운지 알기나 해?라고 말할 순 없다. 해봤짜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친구 사이에 공통화제의 간극이 생기고 그게 점점 멀어지면 평행선을 달린다. 언젠간 다빈이와도 그렇게 될 수 있겠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가볍지는 않았다. 그저 그 시간이 되도록 천천히 와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103page
오카리나 모임에서 만난 이들과 복수전. 생각을 실행으로 옮기다니 대단해.
규옥이 흐음, 하고 숨을 내쉬며 재미있다는 듯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이제 막 기회를 얻었는데 그런 말이 쉽게 나와요? 인생 쉽게 살았나보네."
"쉽게 산 적 없어요."
내가 규옥을 노려봤다.
"그래서 이젠 편안해지고 싶은 것뿐이에요. 꿈 같은 거, 하고 싶은거 따위 생각할 필요 없이 남한테 치이지나 말고 하루하루 편안하게 살아보고 싶어요. 내가 제일 지긋지극하다고 생각하는 말이 뭔 줄 알아요? 치열하다는 말. 치열하게 살라는 말. 치열한 거 지겨워요. 치열하게 살았어요, 나름. 그런데도 이렇다구요. 치열했는데도 이 나이가 되도록 이래요. 그러면 이제 좀 그만 치열해도 되잖아요."-169pa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