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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라는 여자(임경선)

by 하트입술 2015. 5. 11.

전날 밤 어떤 힘겨운 일이 그녀에게 벌어졌어도 아침이 되면 평소대로 씩씩하게 일어나 세상을 정면으로 마주하겠노라는 각오가 느껴지는, 그런 여자를 그려줬으면 좋겠어."

그것은 당시 나의 심경을 대변하는 표지 일러스트이기도 했다. 소설은 '어떤 날 그녀들이' 벌이는 여러 가지 삶의 능동적인 변화들을 담고 있었다. - 60~61 page

 

가령, 우리를 가장 괴롭게 하는 온도의 차이, 열정의 차이.

'그래, 난 그 사람만큼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 이렇게 흔들리는 거야.'

'그는 나를 나만큼 좋아하지 않아.'

서로에 대한 감정의 깊이가 다른 경우도 있겠지만 나는 점점 이것은 상대적인 문제가 아닌 절대적인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그와 나는 열정의 포용 범위가 애초에 다른 것이다. 기질적으로 열정이 없으면 못 살 것 같은 사람이 있고, 머리로는 열정을 원하지만 막상 다가오면 그 소용돌이에 말려드는 것을 겁먹는 사람도 있다. 각자가 가지고 갈 수 있는 감정의 한계점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직접 겪어보지 않는 이상, 아무도 그 지점을 알려줄 수 없다. 사람들은 종종 '내가 상대를 그만큼 사랑하지 않아서 그래'라며 이게 상대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무언가 상황이 바뀌면 또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한쪽의 기초체온이 낮은것을 두고 상대방에을 탓할 수는 없다.

열정적인 연애를 하던 사람은 늘 열정적이었고, 담백한 상대를 골라놓고도 그를 상대로 열정정이었다. 담백한 사람들은 열정적인 상대를 앞에 두고도 늘 담백한 이상의 것을 주지 못했다. 늘 나만, 나 혼자만 그 당연한 사실을 못 보고 있었다. - 120~1

 

하지만 지금은 스스로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인 해석을 할 수 있는 내가 좋다. 왜냐하면 울고 화내기엔 인생은 너무 짧고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은 더더욱 짧기 때문이다. 원래 좀 스스로에 대해선느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해석하는 나르시시스트 경향이 있긴 했지만, 이별 후 그리움으로 상대를 마음속에 남길 수 있는 것은 매우 건강한 거라고 믿고 싶었다.

관계에 대한 낙관성은 그 남자가 나를 놓고 가버림으로써 내게 주고 간 선물이었다. - 188

 

내가 좋아한다고, 잘한다고 믿었던 그것, 좋아하고 잘한다고 믿었으니 분명 나를 행복하게 해줄 거라고 믿었던 그 일은 떄로는 우리에게서 여러 가지 이유로 멀어져갔다. 그 과정에서 내 꿈을 향해 매진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다른 일에 호감을 갖는 것을 자책해야 할 정도로 '옳은' 일은 결코 아니다. '이건 내 길이야'라는 뜨거운 자기확신 보다 '이건 내 길이 아니야'라는 냉정한 현실 인식이 훨씬 더 용기 있는 일일 수도 있다. - 197

 

남자친구나 남편은 물론 사랑하고 좋아한다. 하지만 그와는 다른 친밀감을 공유하는 이성친구가 우리의 기나긴 인생을 따뜻하게 보살펴준다. '속 깊은 이성친구'라고 해서 털털한 남자와 여자가 중성적인 느낌으로 왁자하게 노는 게 아니다. 오히려 남자 지수 혹은 남자 농도, 여자 지수, 여자 농도가 굉장히 높은 사람들끼리 팽팽하게 만나야 유지될 수 있는 것 같다. 왜 더 일찍 만나지 못했을까 아쉬워하고 다른 형식으로 만났으면 어땠을까 상상해보기도 하지만, 그래도 지금의 이런 관계를 충분히 향휴하고 보존할 줄 안다. 감정의 저울질도, 타산도 필요 없다. 속 깊은 이성친구가 소중한 이유는 연인이나 남편과는 달리 어떤 의미에선 나를 가장 나다울 수 있게 해주고 내가 누구인가에 대해 더 잘 알게 해주기 때문이다. - 228